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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읽자

[밤이 선생이다] 말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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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 8점
황현산 지음/난다

어느 글에선가 황현산님의 글은 좋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 미뤄왔던 책입니다. 생각보다는 읽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신문 등에 공개된 내용이다 보니 그렇게 어려운 글은 아닙니다. 다만 경우에 따라 생각할 이야기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특히 말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말이 가지는 힘에 대해 알고 있는 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를 적절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그걸 모르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 큰일이지요.

어쩔 수 없이 작은 수의 어휘만을 사용하여 교안에 충실하게 진행되는 외국어 강의는 학생들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옆길로 새나갈 수 없는 강의는 삶과 공부를 연결해주는 온갖 길을 차단할 것이다. 언어의 깊이가 주는 정서를 학문의 습득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탐구는 모든 지식을 도구화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영어 강의가 사상 통제를 위해 실행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사상 통제의 필수조건인 언어 통제가 그 가운데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아마도 황현산님의 글이 어렵다고 언급한 건 글쓰기에 대한 글이었을 겁니다. 글쓰기에 대해서도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면서 고민 거리를 던져줍니다.

글은 확실히 쉽게 쓸 수 있는 한 쉽게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생각 자체가 나쁜 것이거나 반민중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어렵게 표현될수 밖에 없는 그런 생각이 세상을 억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해야 옳다. 어렵고 까다로운 글보다 간단명료한 구호 투의 말들이 사람드을 더 억압해왔던 예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은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도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


중간에 사진이나 시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등장합니다. 박철 시인의 시도 이야기 중간에 나왔는데 맘에 들어 내용을 옮겨봅니다.

* 문학동네 책은 품절되었고 2013년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다시 출간되었네요.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박철』(문학동네,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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