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파란 하늘입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사진을 열어보니 마치 파란색 페인트로 덧칠한 듯 보입니다. 이런 날에는 저기 보이는 산에 올라가 맑은(아마도 맑게 느껴지는) 공기를 마셔야 할 텐데 말이죠.
서촌에 가면 멋진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부푼 마음으로 찾아왔지만, 잡지에서 보던 그런 풍경이 담기지는 않습니다. 이제 처음 방문한 초짜에게 좋은 풍경을 던져줄 생각은 없나 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어느 곳을 갈지 루트를 작성해서 왔어야 했나 봅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시간이 좀 있다면 골목길을 따라 윤동주 문학관까지 가봐야겠습니다.
주말에는 사람으로 북적이는 공간인데 평일 오전 시간이라 아직은 한가합니다. 가끔 지나가는 단체 탐방객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한옥뿐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주거 공간이 한 곳에 모여있고 느긋하게 차 한잔 마시며 미술품을 감상하는 공간과 북적이는 시장이 넘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우리술문화공간 내외주가는 이런 공간 속에 숨어있습니다. 작은 간판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다면 누군가의 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도만 잘 보고 찾아온다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골목을 잘못 들어가면 한참 헤맬 수도 있습니다.
내외주가(內外酒家)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과부나 가난한 양반가의 안주인이 생계의 수단으로 술을 파는 곳으로 일반 가정집에 "내외주가"라는 글을 걸어놓고 장사를 하는 곳이라는 의견이 있고 색주가(色酒家)와 구분해 직접 술을 만들고 가정식 안주를 만들어 대접하는 공간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내외술집"으로 등록되어 있는데 "접대부가 술자리에 나오지 않고 술을 순배로 파는 술집"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안방술집", "안침술집"이 있습니다. 소설 속에서는 내외주가라는 표현보다는 안침술집이라는 표현이 더 자주 보이네요.
제법 행세깨나 하고 살던 여염집이었는데 액운에 들어 풀칠이나 하려고 안침술집을 낸게 분명하였다 (김주영 / 객주), 문 밖에 용수는 달았으되 내외하는 안침술집이라 문간에 뒤트레 방석에 앉아서 술들을 먹었다 (홍명희 / 임꺽정)
소설어사전 / 고려대학교출판부
하여간 내외주가는 그냥 주점이라고 불리기보다는 간판에 쓰여 있는 것처럼 "우리술문화공간"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이런 멋진 공간에서 중원당 청명주를 만났습니다. 청명주는 1995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청명주 제조법은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데 김영섭 대표는 2007년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됐습니다.
청명주 양조장은 술 빚는 공간 바로 앞에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와서 어른들은 술을 빚고 아이들은 도자기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도자기 빚는 공간은 "화담도예"라는 곳으로 김영섭 대표의 누나인 김유미 작가님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요즘 출시되는 전통주 패키지 중 많은 수가 "우리술방" 패키지를 사용합니다.
자체적으로 패키지를 개발하는 것보다는 비용이 덜 들고 라벨 디자인만 살짝 변형해서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청명주도 작년까지는 도자기 패키지와 "우리술방" 패키지를 사용했는데 지금은 박록담류 전통주 공동 브랜드인 "물에 가둔 불"을 사용합니다.
김영섭 대표가 청명주 제조비법을 전수하였지만 술을 빚는다는 것은 항상 배워나가는 것이기에 박록담 소장님에게 한국전통주연구소에서 술빚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박록담 소장님은 기자 시절 취재 과정에서 청명주를 알게 되었는데 전통주 중에서 청명주만큼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술이 드물다고 합니다.
청명주는 24절기 중 춘분과 곡우 사이의 청명절(淸明節)과 관련된 술입니다. 문헌상에는 청명절에 밑술을 담그고 보름이 지나 덧술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겨울에 담가 100일을 숙성해 청명에 마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마 지역에 따라 술을 숙성하는 온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어서 그런 차이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원당의 청명주는 선대에 술을 빚던 제조비법이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고 다른 문헌에서 이 집안의 청명주에 대해 감탄하는 글이 실려있습니다. 물론 예전에는 탄금대와 청금내 중간의 수살매기에서 물을 떠 와 술을 빚었기 때문에 그때의 술과 지금의 청명주가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대가 빚었던 맛과 향, 그리고 색을 이어가면서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은 청명주를 만나봐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날 청명주와 함께 하는 음식은 포항에서 올라오신 김영섭 대표님의 전통주연구소 동기분이 준비해주셨습니다. 궁중음식 전수자라고 하셨는데 성함을 듣지 못하고 왔네요. 과메기를 비롯해 여러 음식을 준비해주셨는데 과메기를 먹을 때 매실 장아치를 같이 먹으면 비린 맛을 약하게 하면서 속이 탈이 나지 않도록 해준다고 합니다. 잘 말린 과메기라 비리지는 않았지만 매실 장아치와 같이 먹는 맛도 독특하더군요.
궁중에서 이런 음식을 진짜 먹었을까 싶을 정도로 많은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청명주는 우리 음식과 함께 먹을 때 제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너무 향이 진하지도 않고 맛이 달지도 않아 다른 음식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 술 자체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술잔에 마셔도 좋지만, 살짝 입구가 모이는 와인잔을 사용하면 청명주의 향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습니다. 얼음을 넣어서 시원하게 마시면 그 향이 더 짙어집니다.
새로 만든 패키지 캘리그라피는 강병인 작가가 쓴 것이라고 합니다. 강병인 작가의 사무실이 내외주가 근처라 이웃이기도 해서 박록담 소장님이 술을 줄 터이니 글씨를 써달라고 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청명주"라는 글씨를 자세히 보면 뭔가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이 보이는 듯합니다. 작가님이 그것까지 의도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중원당 웹사이트에서 제품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병 제품은 500, 750mL 두 종류로 판매되고 있으며 생주와 살균주를 선택해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생주는 유통기한이 짧고 냉장보관해야 하므로 판매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청명주는 생주와 살균주를 따로 병에 넣어 판매합니다. 두 가지 제품이 큰 차이는 없지만 아무래도 인위적인 살균과정을 거치면서 생주 상태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주문할 수 있으며 충주에 방문했을때 양조장에 직접 찾아가 살 수도 있습니다. 중원당 입구에는 더덕 무침과 민물 매운탕을 맛나게 맛볼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내외주가는 월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문을 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간이 넓은 곳이 아니라서 방문을 원한다면 사전에 전화 문의 후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B컷
서촌에 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가 "서촌차고"입니다. 복순도가 팝업스토어가 운영되는 곳이기도 하죠. 시간이 되면 일정 끝나고 들르려 했는데 다음 장소로 바로 이동하는 바람에 사진만 남았네요.
https://www.facebook.com/seochongarage
얼마 전 통인시장에 왔을 때 마침 엽전 도시락 운영을 하지 않는 날이라...아쉬웠는데 이날도 도시락을 먹을 상태는 아니라서 ^^ 평일에도 11시 30분쯤이면 주변 직장인과 학생들로 긴 줄이 세워집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발소에서 수염을 깎는 어른들이 부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공간을 만나기도 쉽지 않습니다. 전기면도기 덕분에 그런 공간을 찾을 일도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