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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읽자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이 책의 주인공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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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 6점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음. 스토리만 보면 사실 주말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도 않습니다. 어떤 글에서는 막장 드라마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고전이라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고전을 그 이야기 자체로만 평가하면 안되는데,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그렇게 되나 봅니다. 그런 점에서는 고전을 읽기 전에 좀 더 공부가 필요할 듯 합니다.


책을 읽고 나서 참고로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라는 책에서는 저자의 독특한 생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책도 출판하기 전에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 시절이니 이런 기행을 하고도 고전 작가라는 칭호를 유지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는 아들이 요구한 액수보다 약간 많은 돈을 부쳐주었다. "아껴 쓰라"는 편지와 함께. 이 편지를 쓰고서 보름쯤 후에 아버지는 영지의 농노들에게 살해됐다. 따라서 "아껴 쓰라"는 말은 아버지의 유언이 된 셈이었다.


모든 전기 작가들이 입을 모아 지적하는 말이지만, 그는 정말이지 미련 없이 돈을 뿌렸다.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즉시 한턱을 거하게 썼다. 한번은 1000루블을 송금받은 당일 즉시 호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당구 게임을 하느라 900루블을 우아하게 소비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게, 그리고 부적절하게 관대했으며 돈에 대해 다른 사람을 의심할 줄 몰랐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렇게 되기까지 그에게 가장 큰 영감을 불어넣은 사람은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였다. 발자크 역시 낭비벽으로 몸살을 앓던 작가였고 평생을 빚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사람이었다.


3000루블이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돈인지 알려면 당시의 물가 등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러시아 경제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복잡한 환율 계산에 근거하여 대략 오늘날 우리 돈으로 5000만~6000만 원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주 어마어마하게 큰돈, 이를테면 수십억 원 같은 액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 큰 돈이라 아니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돈을 마구 쓰며 살았기 때문일까. 그는 결코 소비하는 인물을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드미트리도 역시 말보다 주먹이 앞서고 아무 대책도 없는, 어찌 생각하면 미련해 보이는 사내이지만 이 긴 소설의 주인공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이 매력적이다. 그 매력의 상당 부분이 막 써버린 돈에 있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분량이 적은 책도 아닙니다. 사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비슷한 분량인데 올해 도전한 고전 중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실패하고 이 책은 그나마 선방했네요. 안나는 전체적인 스토리를 집중해야 하는데 이 책은 오히려 에피소드가 분산되어 읽는 부담이 적었나 봅니다.

딱히 줄을 그어놓은 부분에 대한 언급은 할 만한 것이 없네요. 혹시 나중에 기억할 일이 있을까 싶어 기록으로는 남겨봅니다.


* 영화로도 나와있는데, 영화 포스터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어렵네요 ~




(상)

그들이 대단히 엄정하고 성실한 사람들이긴 해도 나는 소설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부터 책을 내던질 만한 합리적인 핑계를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나 주변에 있는 진실을 감지하지 못하며, 반드시 자신이나 타인을 존경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도 존경하지 않으며 사랑을 멈추게 되면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찾기 위해 애정이 결핍된 상태에서 욕망과 색정에 몰두하여 자신들의 결점이기도 한 야수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렇게 서서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한결같아요. 거의 모두가, 아무도 그 문제를 염려하지 않아요. 단지 저만이 그걸 참을 수가 없어요. 죽을 지경입니다, 죽을 지경


여기서 한 가지 더 지적해 둘 말이 있다. 이 수도원이 그의 인생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녔던 적은 결코 없었으며, 그로 인해 쓰라린 눈물을 흘렸던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억지 눈물에 몰입하다가 한순간이나마 스스로도 그 눈물을 진실인 양 착각할 뻔했다.


알료샤는 <함께 지내면서 모든 일을 목격하고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가슴에 커다란 감명>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창조 첫날에 빛을 만드시고,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다면 첫날 빛은 어디서 비쳤을까요?


바로 오늘 새벽에 선잠에서 깨어나면서 갑자기 <파국, 파국이야!>라며 꿈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외쳐 대기도 했었기 때문에 금방 호흘라꼬바 부인이 말한 <파국>이라는 단어를 듣자 그는 거의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잔인한 집단이지요. 제각기 떨어져 있으면 천사같지만, 함께 어울릴 때는, 특히 학교에서는 말입니다. 잔인해지는 일이 예사이지요. 아이들이 놀려 대기 시작하니까, 일루샤 가슴속의 고결한 영혼이 고개를 쳐들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인간이 신을 고안해 낸 거지. 그런데 기묘하고 놀라운 것은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놀라운 것은 말이다. 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그런 생각이 인간처럼 야만스럽고 사악한 동물의 머리에서 떠올랐다는 거야. 그런 생각은 그만큼 성스럽고 감동적이며 현명한 것인 동시에 그만큼 인간에게 명예를 안겨 주기도 하지


그 방법이 어리석으면 어리석을수록 문제에는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법이니까. 어리석을수록 더 선명해진다는 말이지. 어리석음은 간결하면서도 결코 교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지성은 요리조리 핑계를 대고 꼬리를 잘 감추지. 지성은 비열하지만, 어리석음은 솔직하고 정직하잖니.


사실 인간의 <동물적인> 잔혹성에 대해서는 간혹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동물들에게 너무나 천부당만부당하고 모욕적인 이야기겠지. 동물들은 결코 인간들처럼 그렇게 잔인할 수 없어.


"나는 악마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경 인간이 창조해 낸 것이라면, 자신의 모습과 흡사하게 창조해 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중)

내 소설의 젊은 주인공의 인생에서 두렵고 미확정적인 그 순간의 정확한 의미를 지금 전달하기란 무척이나 벅찬 일임을 나는 솔직히 인정하는 바이다.


판단력이란 바보가 아닌 인간에게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찾아 들지만 그 특별한 순간에 젊은이의 가슴속에 사랑이 찾아 들지 않는다면 언제 찾아든단 말인가?


술에서 깨어 지혜가 작동하면 바보가 되고 술에 취해 지혜가 마비되면 현명해진다네


농부들의 생각으로는 초등 학생은 야단을 맞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거야. 야단을 맞지 않으면 무슨 학생이냐는 거지? 그런데 내가 불쑥 야단을 맞지 않는다고 말해 버리면 그 사람은 실망하고 말 거야. 하지만 넌 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민중들하고는 기술적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거든


저렇게 현명한 사람을 만날 줄은 나도 몰랐어. 난 언제나 민중들의 지혜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거든.


(하)

말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 나 자신이니까! 지난번엔 내가 꿈을 꾼 건지, 아니면, 정말로 당신을 본 건지 모르겠군?


난 이따금씩 인간으로 변신하는데, 일단 변신한 이상 그 결과도 받아들이는 수밖에. 나는 사탄이라서 인간적 현상은 나한테 낯설지 않아


인생에서 그런 추억을 많이 간직하게 되면 한평생 구원받게 됩니다. 그런 추억들 중에 단 하나만이라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게 된다면, 그 추억은 언젠가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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