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에 대해 찾아보면 많이 노출되는 글인데 출처가 없어 기록을 남깁니다.
출처는 '막걸리의 한국학'이라는 이규태 논설위원의 책입니다.
맥주잔은 크고, 양주잔이 작듯이 독한 술을 마시는 나라의 술잔일수록 작고 약한 술을 마시는 나라 일수록 술잔이 커진다. 막걸리는 알콜 도수가 낮은 술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의 술잔들은 상대적으로 클수밖에 없다.이 세상에서 가장 큰 술잔으로 손꼽히는 대포(大匏)가 우리 술잔인 것도 이때문이다.
대포는 큰 바가지 술잔이란 뜻이다. 경주 신라 고분에서 커다란 바가지 모양의 도포(陶匏)가 출토되고 있음을 미루어 대포의 뿌리는 유구하다.
경주 포석정(鮑石亭)의 곡수(曲水) 위에 잔을 띄워 군신(君臣)이 한잔술을 번갈아 마시며 동심일체를 다졌던 바로 그 술잔도 대포였을 것이다.
한솥밥 나누어먹고 정리(情理)를 다지듯이 한잔술 나누어 마시고 의리(義理)를 다졌으며 그 공동체 운명을 확인하는 의식용(儀式用) 술잔이 대포요,대포에 담는 의식용 술은 막걸리이게 마련이었다.
세조(世祖)는 여진족을 토벌하러 함경도로 떠나는 체찰사(體察使) 신숙주를 편전에 불러놓고 궁벽(窮僻)을 타고 오르는 박덩굴을 가리키며 저 덩굴에 박이 여물 때까지 오랑캐를 평정하겠는가고 물었다.
전승(戰勝)하고 돌아왔을 때 그 덩굴에 달덩이 같은 박이 여물었고 세조는 그 박으로 대포를 만들어 막걸리를 가득 붓고 한잔술에 입을 번갈아 대며 취하도록 마셨다고 한다. 이처럼 동심일체(同心一體)를 다지는 의례의 술잔으로서의 대포문화는 다양하게 발달하고 있다.
옛날엔 각 관청마다 한 말들이 대폿잔을 만들어 두고 돌려 마시며 공동체의식을 다지는 의식이 제도화돼 있었다. 사헌부(司憲府)의 대포는 아란배(鵝卵杯), 교서관(校書館)의 대포는 홍도배(洪桃杯), 예문관(藝文館)의 대포는 벽송배(碧松杯)란 대폿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시사(詩社)라 하는 풍류모임에서는 연종배(蓮鍾杯)라 하여 널따란 연잎을 접어 잔을 만들고 막걸리를 담아 연경(蓮莖) 속으로 구멍을 뚫어 코끼리 코처럼 굽혀 들고 돌려 마셨으니 이는 식물성 대포다. 화혜배(花鞋杯)라 하여 기생의 꽃신에 술을 담아 돌려 마시기도 했으니 이는 살냄새 풍기는 동물성 대포랄 수 있고….
대단한 대포문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약속된 사이를 대포지교(大匏之交)라 하기까지 했다. 대포의 술이 막걸리이어야 했던 이유는 막걸리가 남녀노소, 신명(神明) 누구나 마실 수 있는 술이라는 보편성과 약주(淸酒)를 뽑아내지 않고 막 거른 술이기에 순수천진하다 하여 신인결합(神人結合)하는 신주(神酒)로서 쓰여왔기 때문인 것이다.
수십 년간 상실했던 쌀막걸리가 재등장하고 있다. 그 막걸리와 더불어 상실했던 대포의 정신문화도 부흥됐으면 하는바람이다.
(199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