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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읽자

[호모 데우스] 큰 그림은 여전히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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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8점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김영사

사실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기도 하지만, 이런 두꺼운 책은 큰 그림을 보기 힘듭니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따라가기가 힘든 탓인듯 합니다. 뭔가 읽는 방법을 바꾸어야 할 것 같네요. 그래도 일단 기록을 남겨봅니다. 근데, 이전 책이 사피엔스 였으니 이번에는 데우스가 되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음. 이 논리는 좀 부족해보입니다. 뭐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면 자동차가 더 치명적이기도 하고 ~


미국이나 유럽에 사는 보통 사람에게는 알카에다보다 코카콜라가 훨씬 더 치명적인 위협이다.


Photo by Hamish Weir on Unsplash



구약성격을 보면 150년 이상을 살아도 잘 살아간 것을 보면 그런 시대가 되면 적응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람의 한평생이 150년이라고 상상해보라. 40세에 결혼해도 앞으로 살 날이 110년이다. 결혼생활이 110년 동안 이어지는 것이 과연 현실적일까? 카톨릭 근본주의자들도 대답을 주저할 것이다.


신의 능력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기대한 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수천 년 동안 신의 능력으로 여겨진 것들이 오늘날에는 우리가 생각해볼 것도 없는 흔해빠진 일이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옛날의 그리스, 힌두교, 아프리카의 신들보다 훨씬 더 쉽게 먼 거리를 이동하고 의사소통한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구약의 신보다 훨씬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인공비료, 산업용 살충제, 유전자 조작 작물 덕분에 오늘날 농업 생산량은 고대 농부들이 신에게 바랐던 가장 높은 기대치를 능가한다.


잔디는 요즘 미국에서 옥수수와 밀 다음으로 널리 재배되는 작물이고, 잔디산업(잔디, 퇴비, 잔디 깎는 기계, 스프링쿨러, 정원사)은 매년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인다.


과학의 멋진 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과학자들이 어떤 것을 알지 못할 때 온갖 종류의 이론과 추측을 시도해볼 수 있고, 그러고도 결국에는 모른다고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뇌를 이해하면 할수록 마음이 불필요해 보인다. 시스템 전체가 전기신호를 여기서 저기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두려움은 대체 왜 느끼는 걸까?


튜링은 미래에 컴퓨터가 1950년대의 동성애자처럼 될 거라고 내다보았다. 컴퓨터가 실제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일 것이다.


역사는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사람들은 의미의 그물망을 짜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하지만 그 그물은 곧 풀리고, 되돌아보는 우리는 그런 헛소리를 어떻게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독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문자언어는 실제를 기술하기 적당한 방법으로 생겨났지만, 서서히 실제를 고쳐쓰는 강력한 방식이 되었다.


조세 당국이나 교육부서 같은 복잡한 관료조직을 상대해본 사람이라면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서식에 적힌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다.


다섯 살짜리 아이는 어떤 중요한 일이 자신과 무관한 이유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와 아빠도 나름의 문제와 바람을 지닌 독립적인 인간이며, 너 때문에 이혼하는 게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다.


헉. 어쩌라는 거지.


필요한 감수성을 갖추지 않으면 어떤 것을 경험할 수 없고, 많은 경험 없이는 감수성을 개발할 수 없다.


16세기 러시아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정보와 자원을 하나의 허브에 집결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원리는 오직 먼 거리를 가로질러 생산물을 수집하고 분배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국가 전체의 생산활동을 관리 감독할 수 있을 때만 작동한다.


오늘날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는 남아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본론"을 읽을 시간에 인터넷과 인간 게놈을 공부하라고 할 것이다.


예컨데 나는 새해를 맞아 다이어트를 시작하고 매일 운동하기로 결심한다. 이런 중대한 결정은 이야기하는 자아의 독단이다. 하지만 막상 운동할 시간이 되면 경험하는 자아가 우세해진다. 나는 운동하러 가고 싶지 않아서 피자를 주문한 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켠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과거의 고통이 무의미했음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미래에는 계속 고통을 겪는 쪽을 택한다.


우리는 산업혁명 때 말들이 맞이했던 운명을 기억해야 한다. 농장에 사는 평범한 말은 냄새를 맡고, 사랑하고, 얼굴을 알아보고, 울타리를 넘는 등 천 가지 일을 포드의 모델 T나 100만 불짜리 람보르기니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동차가 말을 대체한 것은 시스템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일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력을 검토하면, 바이탈은 경영진의 악덕 중 하나인 족벌주의를 이미 습득한 것 같다. 알고리즘에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기업들에 투자하도록 권고한 것을 보면 말이다.


고고학을 공부할 걸 그랬나 봐요. 뭐 아직은 괜찮으려나.


컴퓨터 알고리즘이 2033년까지 고고학자를 내쫓을 확률은 단 0.7퍼센트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자라는 작업은 매우 정교한 유형의 패턴을 인식해야 하고 수익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했듯이, 2050년에 직업시장, 가족, 생태계가 어떤 모습일지, 어떤 종교적, 경제적 시스템과 정치구조가 세계를 지배할지 실제로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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